‘모사랑개’, ‘모자랑개’ 어떤 말이 맞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여기서 ‘모사랑’이나 ‘모자랑’이 무슨 뜻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럼 ‘개’는 무엇인가?
‘개는 바닷가를 말함이며, “개 ‘浦’로 강이나 내에 조수가 드나드는 곳, 물가, 바닷가”로 해석 된다.
현재 송포는 오목하고 주문리는 볼록하다.-구글지도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개’라고 하면 육지와 바다가 맞닿은 곳은 모두 바닷물이 드나든다. 모든 바닷가는 ‘개’다. ‘장목개’ ‘노두개’ ‘흑동개’ ‘후릿개’ ‘모상개’ ‘모자랑개’ ‘종개-지금의 종포’ 등등의 이름이 붙여진 ‘개’는 많지 않다.
사천지명지(1999년)의 ‘개’ 중에서 유일하게 그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개’가 있다. ‘모사랑개’이다.
이 ‘모사랑개’는 이순신 장군의 최초 거북선 승전지로서 사적인 가치가 높다. 그래서 그런지 ‘주문리’가 맞다. 아니다 모충공원 아래 ‘송포’가 맞다. 서로의 주장이 엇갈린다.
임진난 당시 1592. 6. 1. 장계초고에 고성땅 ‘모사랑포’에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는 기록과 장계(1592. 6. 14.)에서 1592. 5. 29. 사천선창에서 왜선을 분멸하고 그날 밤 이동하여 ‘사천땅 모자랑포’에서 지냈다는 기록과 난중일기(1592. 8. 24.)에서는 3경(밤 12시쯤)에 달빛을 타고 배를 몰아 사천 ‘모자랑포’에 이르니 벌써 날이 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양지'의 기록(60리)과 실제 진주성에서 송포까지의 거리는 약25km
그리고, 1622년~1632년 진주유림학자들이 편찬한 ‘진양지’에서의 ‘모사랑포’는 진주에서 남쪽으로 60리에 위치한 말문리가 있고 동쪽에는 고성 이현, 남쪽에는 사천 삼천진, 서쪽은 바다, 북쪽은 사천 경계로 진주목에 속해 있으면서 진주계와는 떨어져 있었으며, 말문리의 11개 속방 중 바다와 접한 3개 속방(무진포, 송포, 모사랑포)이 있다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말문리’는 지금의 남양동을 포함한 삼천포항까지의 옛 지명이다(삼천포지명지-1994년).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모사랑개’는 옛 ‘삼천포시’ 지역이지 옛 ‘사천군’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모사랑개’는 ‘주문리’가 될 수가 없다.
삼천포지명지와 사천지명지에서 ‘개’로 끝나는 지명을 찾아보면 남해군지명에서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서포면 다맥리마을회관의 노두개(노두개1은 일제시대 간척농지 노두개2는 1960년 이후 간척농지)
흑동개, 굴개, 장목개,
‘개’의 지명지를 답사해보면 ‘개’ 지명지만의 특징이 있다. 제일먼저 내륙에서 보면 오목하게 들어와 있다. 두 번째로는 바닷가에만 있는 지명이다. 세 번째로 좌우로 파도가 없어 그 옛날 방파제가 없었던 시절 배를 안전하게 정박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그 ‘개’ 안쪽의 뻘밭에는 조개(바지락)이 아주 많았다고 주변에 오래 살았던 어른들이 이야기 했다.
남해군지명사전(2003년 삼연 김명철)에서의 ‘후릿개’는 ‘남해군 송정리 노구마을과 마안도 섬 사이의 바다이름’이라는데 사천지명에 없는 특이한 ‘개’이다.
서포면 다맥리에 있는 ‘노두개’를 이 동네 분들이 ‘노덕개’ ‘노들개’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은 ‘모사랑개’ ‘모자랑개’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남해방언연구가 김종도 선생님은 남해읍 평리의 ‘광포’를 이전에는 ‘너웃개’, ‘너른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해 창선면 모상개해수욕장-바로 앞의 섬은 모섬이다.
현재 남해군 창선면 진동리의 ‘모상개 해수욕장’의 ‘모상개’와 ‘모사랑개’는 비슷한 소리로 들린다. 이 두 곳의 특징은 ‘모래가 많다.’
이렇듯 우리의 지명은 구전으로 내려오다보니 사람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불리어지기는 했지만, 본래 그 뜻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천지명지에서 ‘모사랑개’는 ‘선진마을 서쪽에 있는 개, 강변에 모래와 띠(모초:포아풀과의 다년생 풀. 잎은 실 모양. 흰 털로된 꽃 이삭이 이른 봄에 먼저 나옴-1979년 동아신콘사이스 국어사전)가 많았으며,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포진한 곳으로 ’모자랑개‘ 앞바다에서 많은 왜군을 격퇴시켰으며 적의 화살을 어깨에 맞고 치료한 곳’이라고 되어있다.
주문리 선창
삼천포지명지(1994년)와 사천지명지(1999년)에서는 ‘모자랑개’를 ‘지금의 노대동 미룡마을과 충무동마을 앞 바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50여년 전 노룡동(미룡, 충무마을)에서의 구전으로 이곳을 ‘모자랑개’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에서 ‘사천지 모사랑포의 “포”자 글방주로 “사천군 읍 남면 주문리”로 기록’한 것을 두고 ‘주문리가 맞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무단으로 점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편찬한 역사 기록을 정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종포
‘
주문리’라고 주장하는 일제식민지 이후의 ‘주장’들은 왜 ‘진양지’의 기록을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임진왜란 당시 사천해전에서 처녀 출전한 두 척의 거북선을 최초로 출전시켜 승리한 사천 선창 7km 이내에 있는 모자랑포에 정박했다.”
대포항
“이곳 모자랑포 부근 해상에서 거북선 2척과 통합함대 26척이 일본 왜선을 격파하고 이 해전-당시 사천해전-으로 이순신 장군과 군관들이 철환을 맞아 치료와 휴식을 위해 모자랑포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모자랑개는 70여년 그 이전에는 사천시 노룡동(미룡, 충무마을)에서 많이 사용한 말이다. 당시 사용하던 모자랑개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미룡마을 남서쪽과 충무마을 서쪽바다를 통칭한다.”
광포항
“이곳 수심은 얕아 바닷물이 빠지면 해수욕장과 같이 넓은 모래밭이 나타나는 곳이다. 500년 전에는 난곡산(모자랑개 위치에 있는 산)과 모자랑개는 해안선으로 붙어 있었을 것이며, 그곳에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노천 우물이 있었다. 현재는 전부 매립 되었다.”
진주에서 남쪽으로 60리에 위치한 ‘말문리’ 속방 중의 하나인 ‘모사랑포’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다맥마을회관에서 본 노두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