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 허목은 조선 당대 최고의 전서체 대가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런 분이 어떻게 구계서원에 와서 구산사비문을 쓰게 되었을까?
정확한 기록은 아직 없다. 학계에서도 모르고, 동성 이씨, 종중에서도 모른다.
인근 대학에서 연구를 좀 했다는 교수라는 사람들도 모른다.
서로 사돈집안 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추측이 불가능하다. 사돈간이었기 때문에 왕래가 빈번하지는 않았더라도,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글씨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추론이다.
미수 허목의 생존 연대 안에 구산사 건립 연도가 있다.
서로 사돈간이었다는 기록은 그 집안의 족보를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족보에 보면 이정의 손자 이곤변이라는 인물이 있다.
이 이곤변이라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4번 등장한다.
---------------------------------------------------------------------------
▶1595년 3월 9일(임오/4월 18일)
맑다. 저녁나절이 대청으로 나갔다. 방답(防踏)에 새로 부임한 첨사(僉使) 장린(張麟), 옥포에 새로 부임한 만호(萬戶) 이담(李曇)이 공사례(公私禮, 인간으로서의 예)를 올렸다. 진주(晉州)의 이곤변(李坤忭)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 1596년 7월 6일 (신미) 맑다. [양력 7월 30일]
일찍 나가 각 처의 공문을 처리하여 나누어 주었다.
저물 무렵에 거제현령 ∙ 웅천현감 ∙ 삼천포권관이 와서 봤다. 이곤변(李鯤變)의 편지도 왔다. 그 사연 속에는 입석(立石)의 잘못을 많이 말했다. 우습다.
▶1596년 윤8월1일[9월22일] 맑음.
일식(日飾)이 있었다. 5일간에 걸쳐 체찰사를 만나고 이른 아침에 비망진(飛望津, 망산 아래 삼천포나루터)에 와 이곤변 등과 같이 아침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저물어서 한산진중에 이르니, 우수사 경상수사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우수사와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했다.
▶병신년(1596년) 8월29일[9월21일] 맑음.
일찍 진주를 떠나 사천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은 뒤에 그대로 가 선소(船所, 선전리 선소마을)에 도착했다. 고성현령(조응도)도 왔다. 삼천포권관과 이곤변이 술을 가지고 뒤따라와 밤늦도록 함께 이야기했다. 망산 아래 구라량(仇羅梁, 사천시 대방동 굴항)에서 잤다.
이곤변이 내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일찍이 명나라는 관리를 뽑는 데 학문을 우선시했고, 왜국은 무사를 뽑는 데 그 재능을 높이 꼽았습니다. 다만 조선만이 신분과 가문을 보고 관리를 뽑습니다. 이는 곧 망국의 길입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다.”
삼천진권관 이곤변. 고성현령 조응도와 밤이 깊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충신 중에 충신이다. 어디서 이들과 같은 장수를 또 얻을 수 있겠는가? 밤에 먹을 갈아 능(能)자를 썼다.
-------------------------------------------------------------------------
이 이곤변의 손녀사위가 미수 허목의 동생이다. 그리고 오리 이원익의 손자가 또 이곤변의 사위이다. 그리고 미수 허목은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고, 그 미수 허목의 동생이 이곤변의 손녀사위이다. 그러니까 미수 허목은 20대 때, 구암 이정 선생님을 알고 구계서원도 알고 있었다고 유추된다.
이것은 서로 사돈지간으로 미수 허목 동생의 처갓집이므로 서로 왕래가 자연스러웠을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이유를 모르면 왜 미수 허목 선생님께서 구산사비문을 쓰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구산사비 글씨를 미수 허목이 40대 때 썼는데, 20년 이상 그 집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곤변이 난중일기에 네 번 등장한다. 그 이곤변의 손자 사위가 미수 허목의 동생이라 그리고 오리 이원익의 손자가 이곤변의 손녀사위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니까 저 사람이 무슨 연유로 글씨를 쓰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구암 이정(1512-1571) 선생님의 손자 이곤변의 또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 이곤변(李鯤變)_ 사천시가 관향인 동성이씨(東城李氏)이다. 동성은 사천의 옛 명칭이다. 명종(1534~1567) 때의 문신 구암(龜巖) 이정(李楨)의 손자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삼천포권관으로 있으면서 이순신 장군과 가깝게 지냈는지 난중일기에 여러 차례 이름이 나온다. 1551년생으로 충무공보다 6살 아랫니다.
또한
“강응황 가계(족보)를 풀이한 '영원한 합천인' 조찬용의 글에서 이곤변의 기록이 있다.
'단성현 신안면 출생인 강공현(1523~1588) 아버지는 지중추부사.공조판서 강현(1486~1553)이다. 강공현 아들 강칭( 강이 1544~1597)은 진주 금곡면의 하춘년(1522~1570 별검) 딸에게 장가 갔는데, 강칭(강이) 차남이 강응활이고, 강칭(강이) 사위가 1628년 ~1631년(인조9) 이른바 '광해복위사건' 때 150여명과 함께 처형된 소고 박광선(1569~1631)이다. 강칭(강이) 손아래동서가 구암 이정 손자인 진사 이곤변이다.'“
“어득강의 사위가 남지이고 남지의 사위가 이응인(구암 이정의 장남이며, 이곤변 형제의 아버지) 남지의 또 다른 사위가 합천 초계 출신 의병장 안극가이다.”
구암 이정의 손자 이곤변(난중일기에 4번 등장)한다. 그의 형은 이호변이다.
이곤변의 손녀사위가 이수기(오리 이원익의 손자), 허의(미수 허목의 동생)가 있다. 허목은 오리의 손서이다.
20대부터 20년 이상 사돈가문을 잘 알고 있기에 구계서원 뜰에 있는 구암사비 글씨를 미수 허목이 써준 것이라면 두 말이 필요 없다.

****구계서원****
선조 39년(1606)에 세웠으며, 광해군 3년(1611) 사당인 구산사를 세웠다. 숙종 2년(1676)에 '구계'라는 현판을 나라에서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경종 3년(1723)에는 성옹 김덕함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으며,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던 것을 1931년에 다시 세웠다.
허목(한국 한자: 許穆, 1596년 1월 10일(음력 1595년 12월 11일[1]) ~ 1682년 6월 2일(음력 4월 27일))은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겸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2], 호(號)는 미수(眉叟)[3],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인조 때의 남인 정승, 오리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구계서원은 사천읍 구암리 만죽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향교가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계승된 지방의 공공교육기관이라 한다면 서원은 조선 중기에 보급된 지방의 사학기관으로써 유현의 위패를 모시고 유림(유학자)들의 학문을 장려한 기관이라 하겠다.
조선시대는 건국초부터 육영에 힘을 써 고려시대의 사원을 대신하여 서재, 서당, 정사, 선현사 등을 장려하였다.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곤양군수를 지낸 바 있음)이 순흥에서 고려시대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서원이었다.
이후 소수서원이라는 액을 하사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 하사된 서원)이 되었으며, 또한 황폐되어 가던 향교를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사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이상으로 살핀 바와 같이 구계서원은 명종 때 높은 벼슬을 두루 거친 문신(문관인 신하)이자 학자인 구암 이정선생을 기리고 향사(제사를 지냄)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처음은 이정선생이 별세한지 40년 만인 광해군 3년(1611)에 유도를 닦는 학자들과 고향의 마을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향리인 만죽산 아래에 구산사란 사당을 지었다.
이후 인조 23년(1645) 4월에는 사천 사림(유학자)들의 소청(임금에게 알리어 청함)으로 나라에서 구계라는 액호가 내려 이때부터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로부터 190여년이 지난 고종 5년(1868), 대원군이 섭정(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림)하자 전국에서 사표가 되는 47개의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미흡한 사액서원은 모두 철폐 당했다. 그러다가 60여 년이 지난 1931년 봄에, 대관대유계의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서원이 복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3년 12월에 사단법인체로 등록되고 이어 1983년 8월 6일에 도지정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현재 서원에는 이정선생과 대사헌의 벼슬을 지낸 성옹 김덕함선생 두 분의 위패를 모셔 놓은 묘당(사당)과 뜰 아래에는 구산사비를 비롯하여 김덕함, 최관두 선생의 기적비가 나란히 서 있고, 또 내삼문(금기문) 밖에는 동재, 서재, 풍영루 등의 건물이 있다.
구산사 아래 좌측에는 허목의 글이 새겨져 있는 구산사비龜山祠碑에 새겨 놓은 비명은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양천사람 전서체의 대가 미수 허목이 지었다.
명에 가로되 ‘명은 물에 근심하였기에 제사하며, 용은 땅에 근심하였기에 제사하노라’하였다.
‘명’에 사대한 글귀는 맘에 들지 않는다.
***** 도움 주신 분 <대한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박갑로 선생님 ******